어릴 적 저희 집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생선 장사를 하셨고, 어머니는 제본 공장을 다니셨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글 한 줄 읽고 쓰지 못하셨던 아버지… 지나고 보니 그 시절 아버지는 삶이 참 얼마나 고되고 힘드셨을까 싶어 가슴이 아려옵니다.
저는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성적이 좋아 취업이 잘 되던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 삼성물산에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늘 대학교에 대한 열망이 솟구쳤습니다. 공부할 시간을 벌어야겠따는 생각에 전화교환 자격증을 따서 현대필름과 남광토건의 전화교환원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교환원 둘이서 따로 쓰는 방이 있어 남는 시간에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인생 최고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는 결혼 조건 1순위가 늘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연애 감정보다 존경심이 먼저 들었던 그 사람과 인연이 닿은 것입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가정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정말 고마운 존재이지요.)
"가난을 끊어내기 위해 멈추지 않았던 날들"
'사람이 가난한 것은 부지런하지 않고 배우지 못해서다'라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책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쓰리잡을 뛰었습니다.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던 아파트 단지 내 세차권을 따내기 위해 새벽 알바부터 시작했지요. 당시 한겨레에 다니시던 분과 인연이 닿아 동업으로 오전에 세차 일을 하고, 오후에는 후원파트 대리로 출근하며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혼할 무렵에는 '경매'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경매장에 일반인은 발도 들이지 않던 때라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직접 경매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등기소에 일일이 찾아가 서류를 발급받고 발로 뛰며 경매를 배웠습니다. 그렇게 신혼집도 잠실의 경매 물건을 직접 낙찰받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선물한 시간, 그리고 스스로 멈추지 않은 성장
첫 아이가 태어나자 남편은 제가 아이 양육에만 집중해 주길 바랐습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생각 하나로 유치원 대신 <애들아 나들이 가자'>라는 모임을 직접 만들어 아이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온갖 체험을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품 안에서 사랑으로 키운 딸은 어느덧 잘 자라, 이 나라의 복지를 책임질 멋진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사실 시댁의 남달랐던 아들 바람 때문에 둘째 계획은 아예 없었습니다. 딸 뒤에 또 딸을 낳을까 저 역시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뜻밖에 미국에서 둘째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 역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느라 배 속의 아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함이 컸는데, 그 아들도 훌륭하게 자라 이번에 명문대에 합격하고 공학박사를 꿈꾸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할 때, 그저 아이들만 바라보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도전하는 삶을 직접 보여주고 싶어 치열하게 자격증을 땄습니다. 거푸집, 화훼장식, 전산세무회계 1급, 사회복지사, 약초관리사, 요양보호사 등… 그렇게 취득한 자격증만 어느덧 30~40개가 넘어가네요.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며
치열하게 연구하고 발로 뛴 덕분에 다주택자로서 집 4채 중 2채는 정리하고, 현재는 집 2채와 근린생활시설, 그리고 현금 자산과 주식 등 부족함 없는 자산을 일궈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부의 축적'을 넘어, 언젠가 내가 떠날 그 자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을 믿기에, 먼 훗날 주님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고 싶습니다. 부모님을 정성껏 돌보고, 제 노후의 행복을 누리며,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온전히 뿌리고 떠나는 것이 이제 제 삶의 새로운 목표입니다.
치열했던 제 지난날의 고백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에도 따뜻한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