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퇴사 고민 글을 몇 번 남겼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날짜를 정하고 퇴사를 한달여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면담을 마무리하고, 이제 4월말경 퇴사 예정이에요.

전체 경력으로는 24년,

워킹맘으로는 20년 간 일을 해왔습니다.

올해 제 나이는 벌써 마흔 일곱이 되었네요.

물질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던 유년시절을 거쳤습니다.

17평짜리 방 2개 집에서 보일러도 안 되는 냉골에 찬 물 밖에 안 나오는,

그나마도 세 살 아래 남동생과 고3까지 같은 방을 썼어요.

책상도 없이 벽에 기대어 공부했고,

겨울에는 밤새 공부할 때 손이 시려서 거실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했습니다.

돈 얘기만 나오면 싸워대는 집에서 문제집 사겠다는 말이 안 나와서,

교과서는 조사와 연결어를 빼고는 통째로 외워버렸고,

문제집은 여러번 보다보니 너덜거려서 선생님께서 따로 문제집을 챙겨주시기도 하셨죠.

엄마는 심각한 결벽증이 있었고,

아버지와의 평생 갈등으로 그 울분을 모두 저에게 풀어댔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회색으로 기억되네요.

대부분이 회색이고 아주 작은 점처럼 몇개의 분홍색 추억이 보이는.. 대체로 우울한 기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권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사회에서 나름대로 명문대로 인정받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도 하기 전부터 취업해서

굴지의 대기업들을 다니면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 같아요.

모두 남초 회사들이었지만 모든 직급 최연소로 달았었고,

마지막에는 마찬가지로 최연소 임원 발령 받았지만

너무 지쳐 있던 상황에 다 두고 퇴사해버렸습니다.

건강도 몹시 상해했는지 퇴사하자마자 긴 입원생활을 했었고,

회복한 후 다시 비슷한 규모의 대기업에서 일을 한지 4년이 조금 안 되었네요.

원래 복귀할 때 딱 3년만 더 일해서

그 기간 동안 고3, 중2 딸 아이들 학원비와 대학등록금을 모두 벌어놓자가 목표였고,

그 목표는 3년이 되던 해에 이미 이루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마침 작년 9월 초에 회사가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바로 그만두려고 했지만 막연한 두려움으로 퇴사 일자를 자꾸 미루었었어요.

이때까지는 이름 있는 회사와 직급이 나를 대변했는데

아무런 명함도 없이 동네 아줌마로 잘 살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고,

새로운 직업을 갖고 싶어서 교육 코스도 작년 9월에 시작했지만

이 나이에 그 분야 경력도 없는 나를 과연 써줄 것인가,

공부한다고 5백만원 비용만 날리고 일자리를 못 잡으면 어쩌나.. 겁도 나고요.

그렇게 아득바득 노력해서 이루어 둔 성과들을 모두 다 내려놓는 것이 몹시 허무한 심정이 들었거든요.

뭔가를 크게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이탈하는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도 웬지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도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 환경이었나...

어릴 때도 힘든 환경을 이겨냈어야만 했고,

결혼할 때도 부모님 도움 없이 모든 경비 제가 치뤘고,

결혼해서도 집에 들어가는 큰 돈은 제가 여러번 감당했습니다.

회사에서도 C-Level 대상으로 전략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하는 일이었으니

일 자체도 너무 긴장감과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어요.

그렇게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느라 하루 2시간도 못자고 살 때

양가 15분 거리의 어머님들 주부셨지만 아무 도움을 안 주셨고,

시터이모님 아침, 저녁으로 다른 분 모셔가며 일했었습니다.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제 워크로드로는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가고가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 남편은 8시에는 퇴근을 하니 남편이 시터이모님과 바톤 터치했기 때문에

제가 그 많은 야근들을 해내며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미친듯이 사는거 아시면서도, 양가 어머님들은 반찬 한 번을 안 해주시는...

물론 어머님들이 그렇게 하실 의무는 없다는 것 압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참 서럽더라고요.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면,

뭔가 도움이 있었었다면,

그럼 나는 덜 지쳤을 것이고,

그럼 일을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내던진 임원 발령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순자산 30억원을 쌓았고,

물리적으로 4시간 출퇴근은 너무 힘들고,

또 지금 내 나이로 다른 조직으로 가는 것도 자의/타의적으로 무리이고,

그러니 지금껏 쌓은 자산을 기반으로 앞으로 남편이 벌어올 수익에 맞춰 살아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혹여 새로운 직업의 기회가 저에게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구요.

참! 가장 중요하게는 올해 고3되는 큰 딸아이, 중2 작은 딸아이 밥이라도 따뜻하게 챙겨먹이고 싶어요.

그 동안은 제가 아침은 식탁에 차려놓고 저녁은 냉장고에 넣어두면

렌지 데워먹고 학교 학원 다녔거든요.

찬거 데워 먹는것이 늘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이제 4월말이 퇴사일입니다.

한 달 동안 마음 정리 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그리고, 잘 한 결정이라고,

새출발 힘차게 하면 된다고,

인생 선배님들께서 응원 해주신다면 정말 힘이 될 것 같습니다^^